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쁜 페미니스트 (문단 편집) === 대중매체 속 [[캐릭터의 유형]]에 대한 성찰 === 저자는 본서에서 다수의 영화비평을 하고 있는데, 특히 그 중에서 '''[[클리셰]]가 되어 버린 [[캐릭터의 유형]]'''을 비판하는 지점들이 몇 가지 있다. [[나무위키]]에서도 저자가 이들 클리셰에 대해서 어째서 상상력이 부족하고 정형화되어 있다고 생각하는지 비판하는 이유를 소개한다면, 차후 창작물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데 있어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우선 1부에서 저자는 《여성 캐릭터는 왜 항상 호감만 연기해야 하는가》 에서 '''호감형 여성 캐릭터'''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물론 비호감 여성 캐릭터가 무조건 "옳다" 거나, 그런 캐릭터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 의 홀든 콜필드처럼 비호감 남성 캐릭터는 그 비호감적인 면이 하나의 매력 포인트가 되고 공감대를 일으키지만, 비호감 여성 캐릭터는 그냥 작품에 쏟아지는 혹평의 원인이 되고 만다. 그 결과 여성 캐릭터들은 독자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주인공/대인배형|아무 이유 없이 지루하게 착한 캐릭터]]"(p.85)라는 가장 진부한 캐릭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비인간적인 캐릭터화다. 여성 캐릭터를 비호감이라고 규정하게 만드는 여러 성격 특질들은 사실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인 특질'''이기도 하며, 반대로 소위 호감이라고 불리는 성격이야말로 "매우 정교한 거짓말이며 기술적인 연기이고 이 사회가 강요하는 행위 규범"(p.81), 즉 [[성 역할]] 내지는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Firestone)도 연애 시절에는 한없이 호감가는 인상이었던 그녀가 결혼하고 나면 갑자기 '[[아내|마누라]]' 가 되어 버리는(…) 상황에 대해, 그저 그녀가 착한 여성 연기를 그만두었을 뿐이며 가장 자기답고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물론 일상에서는 타인에게 호감을 주는 것이 [[사회생활]]에 중요하긴 하지만, 문예비평에서까지 등장인물이 '호감형' 이네 아니네 하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소설작법]]과 관련하여 제임스 우드(J.Wood)나 클레어 메수드(C.Messud)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 호감 가는 [[친구]]를 찾으려고 드는 경향이 있다.''' 독자는 소설 속에서 자신과 사귈 가상의 친구를 찾고, 그저 어떤 인물들은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뿐인데, 이상하게 여성 캐릭터가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비난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캐릭터에 정이 들지 않는다고 작품 자체를 박하게 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가 얼마나 생생하게 묘사되었는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창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캐릭터를 디자인한다는 것이 '작가 자신과는 다르면서도 실제로 존재하는 듯하고, 게다가 작중에서 겪는 온갖 역경을 견뎌낼 수도 있어야 한다' 는 점 때문에 쉽지 않다는 데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제는 민폐형 캐릭터, 엉망진창 캐릭터가 생동감 있게 묘사되게 하자'''고 제안한다. 이 캐릭터들은 [[아싸|친구를 사귀려 자신을 치장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자신에게 더 중요한 다른 일로 인해 늘 바쁘다. 심지어 민폐랄 것도 아닌 것이,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면 이들은 담대하고, 결단력 있고, 자립심 있고, 주장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의 호감을 사려고 애쓸 생각이 없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유형이다. 그렇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런 캐릭터 컨셉에 대해서 [[이중잣대]]를 동원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조금 생각해 보자면 모든 비난 받는 캐릭터들이 전부 비호감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저자의 포인트는, 여성 캐릭터가 다양하지 못하며 정형화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소설 속에서 자기 여친을 찾으려고 드는 경향' 에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창작물 속 여성 캐릭터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비판했으니, 이번에는 여성 독자들이 창작물을 접하면서 남성 캐릭터에 대해 갖게 되는 판타지를 비판해 보자. 저자는 1부 말미의 《50가지 그림자와 동화 속 왕자님》 에서, [[여성향]] 장르 매체에서 흔히 등장하곤 하는 '남주' 의 캐릭터 유형, '''동화 속 왕자님 캐릭터'''를 비판한다. 왕자님 캐릭터는 〈[[인어공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잠자는 숲 속의 공주]]〉 같은 오래된 이야기들부터 〈[[트와일라잇 시리즈|트와일라잇]]〉 의 [[에드워드 컬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동화는 좋아하는 저자이지만 왕자님 캐릭터는 통 좋아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런 '왕자님' 들은 '''무작정 멋있다고만 하지, 도대체 어디가 멋있다는 건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 특히, 저자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의 통제와 지배를 사랑으로 정당화하는 남주 캐릭터에 여성 독자들이 환호하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 흔한 사례를 들자면, [[카베동]]은 로맨틱함도 아니고 카리스마도 아니며, 단지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복종시키기 위한 위협일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에리카 제임스(E.L.James)의 에로틱 로맨스 〈Grey: Fifty Shades of Grey〉 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BDSM]]을 소재로 하는 에로티카(erotica)인데, 저자의 기준에 그 작품성은 한심할 수준이지만, 30-40대 여성들에게 많이 읽혔다는 이유로 인하여 언론에서는 "[[엄마]] [[포르노]]" 같은 호들갑스런 보도가 이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해 저자가 가장 비판하는 것은, 여주가 남주를 "동화 속 왕자님" 이라고 생각했다가 실제로는 "죄악 속에 빠진 소년" 임을 알고 구해주게 된다는 '''비현실적인 [[내러티브]]'''를 따른다는 것이다. 작품 속의 남주 캐릭터인 크리스천 그레이(C.Gray)는 여주 캐릭터를 통제하고 집착하며 지배하고 독점하며 학대하지만, 그 모든 권력의 작용은 달콤한 [[섹스]] 장면을 통해서 그럴싸한 동화 속 왕자님 같은 환상으로 포장된다. 여주는 또 자신이 남주를 '구원할 수 있다' 고 생각하고 그 모든 것을 선선히 수용한다. 하지만 그레이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저지르는 모든 [[기행]]들은 실상 "열여섯 살 철부지 소년처럼 말 그대로 영역 표시를 하는 것"(p.186)일 뿐이라는 얘기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며 여성은 지배당해야 한다는 논리는 심지어 〈[[트와일라잇 시리즈|트와일라잇]]〉 의 [[에드워드 컬렌]]도 피해갈 수 없다. '''여성을 자기 멋대로 다루면서도 "이것도 다 널 사랑해서야" 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남주 캐릭터'''는, 더 이상 '동화 속 왕자님' 이라고 불려선 안 되며 오히려 "[[얀데레|반은 미친 놈인 왕자님]]"(p.186)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서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인종]] 관련 [[클리셰]]로 저자가 거론하고 있는 사례로 '''마법의 깜둥이'''(magical Negro)가 있다. 국내 내지 동아시아 창작물에서는 [[흑인]]이 그리 많이 나올 일이 없다 보니 흔치는 않지만, 이 클리셰는 〈[[사랑과 영혼]]〉, 극장판 〈[[섹스 앤 더 시티]]〉 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심지어 [[1960년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인 〈The Help〉 에서는 여기에 해당되는 등장인물이 무려 13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 클리셰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데, [[청소부]]나 [[하녀]] 등 온갖 수모를 겪는 '''하위 신분의 [[흑인]] [[중년]] [[여성]]'''으로, 자신의 내면적 힘을 통해서 철없는 [[백인]] 주인공을 감화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고 격려하고 발전의 계기를 제공하는 '''조력자형 인물'''이다.[* [[서부극]]의 경우 이런 역할은 북미 원주민 캐릭터가 맡기도 한다. 원주민 남성이 잘 안 되는 영어로 무뚝뚝하게 더듬더듬, 그러나 지혜롭게 조언한 몇 마디에, 우리의 백인 주인공이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사건을 반전시킨다는 줄거리.] 이 클리셰는 흑인들이 그런 비참한 처지에서 백인들에게 그만큼의 마음 씀씀이를 드러내기 힘들다는 점에서[* 저자는 그런 비참한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그렇게 헌신적이고 협조적이며 지원적이려면 [[마법]]의 힘이 아니고서는 안 될 것이라고 깠다.]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인종차별]] 문제를 '[[옛날 어린이들은|순수했던 우리네의 그때 그 시절]]' 처럼 보이게 한다고 한다. 서구 문화매체에서 [[흑인]]들의 삶이 주인공급으로 묘사될 때, 많은 감독들과 작가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남북전쟁]] 시기나 흑인 [[노예]]들의 생활을 주제로 삼는다고 한다. 저자가 본서에서 [[리뷰]]한 영화들 중 다른 예로는 〈[[장고: 분노의 추적자]]〉, 〈[[노예 12년]]〉 같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의 서사"''' 는 역설적으로 흑인 영화의 서사적 다양성을 해치고 있으며, 어떤 작품을 보나 다 그게 그거인(…) 문제를 초래한다. 저자는 이런 영화를 보면 어떤 서사적 통찰력이나 창의성, 실험정신보다는 오히려 '''잔인함, 흉폭함, 무감동함으로 인한 정신적 괴로움'''만을 느낀다고 한다. 이처럼 "흑인 여러분, 흑인들이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살았습니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앵무새]]마냥 외치는 듯한 작품들만 몇 트럭씩 쌓여 가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흑인 영화의 시장에 악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저자는 흑인 영화에 '''더 많은 예술적 실험이 필요'''하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흑인들의 '''생생한 경험'''이 드러나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맥락에서 저자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Fruitvale Station)를 굉장히 호평하고 있는데, 자세한 [[리뷰]]가 필요하다면 본서 3부의 《한 흑인 청년의 마지막 하루》 를 참고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